
유엔 적국조항 삭제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입장 차이가 유엔 무대에서 다시 충돌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아 있는 적국조항의 삭제를 요구하자 중국은 일본의 최근 방위력 강화 움직임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쑨레이 주유엔 중국대표부 부대표는 28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일반토의에서 일본의 적국조항 삭제 요구에 대해 “일본의 재군사화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유엔헌장의 적국조항을 변경하거나 삭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쑨 부대표의 발언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적국조항의 삭제를 촉구한 데 대한 중국의 공식적인 반박으로 해석된다. 중국은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 범죄를 인정하고 유엔헌장 전체를 받아들인 뒤 유엔에 가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적국조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적국이었던 일본과 독일 등 옛 추축국을 대상으로 한 유엔헌장상의 규정을 일컫는다. 현재 헌장에는 이들 국가에 대해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이나 선전포고 없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조항이 남아 있다.
유엔총회는 해당 조항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2005년 ‘적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실제 헌장 개정을 위한 절차가 완료되지 않으면서 관련 문구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일본 외무성은 적국조항이 이미 사실상 효력을 잃은 사문화된 조항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면 중국은 일본의 군사력 확대 움직임을 근거로 이 조항의 존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양국의 시각 차이는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중국 측은 특히 일본의 최근 방위정책 변화에 주목했다. 쑨 부대표는 일본이 방위비를 늘리고 살상무기 수출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중·장거리 미사일 배치와 공격 능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이 지역과 국제사회의 평화·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이후에도 적국조항을 거론하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가능성에 경고를 보내왔다. 일본은 이에 대해 해당 조항이 이미 현실적인 법적 근거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반박해왔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가 인용한 중국 내 일본 전문가 역시 일본의 적국조항 삭제 요구를 군사력 확대를 위한 제약을 줄이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면서 지역 군비 경쟁과 안보 불안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중국 측 전문가와 매체가 제시한 평가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적국조항 삭제 문제는 단순한 유엔헌장 개정 논의를 넘어 일본의 전후 안보체제와 방위력 강화, 중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 차이, 대만해협을 둘러싼 지역 안보 문제까지 연결되고 있다. 향후 관련 논의가 이어질 경우 헌장에 남은 역사적 문구의 법적 의미와 함께 동아시아의 변화한 안보환경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가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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